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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는 微妙玄通(미묘현통)하여 - 논밭에서 읽는 노자<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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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가난해질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 세상의 가난은 끝내 풀어지지 않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제대로 된 도사는 자기를 채우지 않는다. 언제나 부족한 상태로 만족을 삼는다.

옛적에 제대로 된 선비들은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었기에 억지로 겉모습을 그려볼 것 같으면, 머뭇거리기는 겨울 냇물 건너는 것 같고 주춤거리기는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의젓하기는 손님 같고 나긋나긋하기는 얼음이 막 녹는 것 같고 투박하기는 통나무 같고 품이 넓기는 골짜기 같고 흐릿하기는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누가 흐릿하면서 고요하여 그것을 천천히 밝힐 수 있을까 누가 가만히 있으면서 움직여 그것을 천천히 생겨나게 할 수 있을까 이 도(道)를 모신 자는 스스로 채우지 않으니, 스스로 채우지 않는 까닭에 낡으면서 새것을 이루지 않을 수 있다.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는 微妙玄通(미묘현통)하여 深不可識(심불가식)이니라. 夫惟不可識(부유불가식)하여 故(고)로 强爲之容(강위지용)이면, 豫兮若冬涉川(예혜약동섭천)이요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이요 渙兮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이요 敦兮其若樸(돈혜기약박)이요 曠兮其若谷(혼혜기약곡)이요 渾兮其若濁(혼혜기약탁)이니라.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하고 孰能安以動之徐生(숙능안이동지서생)이리오 保此道者(보차도자)는 不欲盈(불욕영)이라. 夫惟不盈(부유불영)하니 故(고)로 能蔽不新成(능폐불신성)이니라.

www.jadam.kr 2005-10-19 [ 유걸 ]

옛적에 제대로 된 선비(古之善爲士者)란 도(道)를 제대로 닦아서 그대로 살아간 사람을 가리킨다. 도인(道人)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안 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농부(農夫)라는 이름으로 산다고 해서 모두가 진짜 농부는 아닌 것이다. 시절이 고약해지다보니 가짜 박사 가짜 스님만 아니라 가짜 농부도 적지 않은 요즘이다.

미묘현통(微妙玄通)은 번역하기가 어려운 문자다. 넉자를 따로 읽는 게 좋겠다. 미(微)는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다. 묘(妙)는 있긴 있는데 없는 것 같아서 도무지 정체 파악이 안 되는 것이다. 현(玄)은 끝이 안 보이도록 가물가물한 것이다. 통(通)은 사방으로 열려 있음이다. 옛적에는 도인(道人)이 많았는데 미(微)하고 묘(妙하고 현(玄)하고 통(通)해서 도대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슬쩍 봐서는 별것 아닌 존재요 미미한 모습인데 보면 볼수록 깊고 넓어서 가 닿지 않는 곳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고 퍼내도 퍼내도 괴어있는 우물처럼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제대로 된 선비다. 여기서 말하는 선비[士]는 조선시대 글 읽는 선비가 아니다. 도사(道士)라고 읽는 게 낫겠다. 농부도 제대로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일에 도사가 되어야 한다.

www.jadam.kr 2005-10-19 [ 유걸 ]

도사의 속알을 파헤쳐 분석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그 겉모습만 대강 그려본다. 무슨 일을 해도 머뭇거리고 주춤거린다. 겨울에 얼음 언 개울을 건너는 사람처럼, 두려운 이웃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바에 늘 조심스럽다. 함부로 아무렇게나 마구 처신하지 않는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간 사람처럼 의젓한데 그러나 몸과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지 않다. 엄숙하기만 하고 심각하기만 하여 나긋나긋하거나 따뜻한 기운이 없는 자는 진짜 도사가 아니다. 봄날에 얼음이 막 녹으려는 것처럼 그렇게 풀어지는 맛이 있어야 한다. 돈(敦)을 ‘투박하다’로 옮겼지만 얕지 않고 도탑다는 뜻이다. 사람이 얕은 수를 쓰지 않는다. 그게 도사다.

통나무는 옛날에 그릇을 만드는 재료였다. 그릇은 한번 만들어지면 그 모양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통나무는 제 속에 온갖 모양의 그릇을 담고 있다. 그래서 통나무 같은 사람은 여기서는 이런 모양 저기서는 저런 모양으로 자기를 나타낼 수 있으면서, 그 어떤 모양도 고집하지 않는다. 한번 만들어진 제 모양을 고집하는 사람은 통나무가 아니라 그릇이다. 그래서 공자도 군자불기(君子不器)라, 군자는 그릇으로 처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www.jadam.kr 2005-10-19 [ 유걸 ]

광(曠)은 넓다는 뜻이다. 광(曠)이라고 하면 야(野)가 어울리는 말일 텐데 여기서는 엉뚱하게(?) 곡(谷)과 같다고 했다. 골짜기가 어찌 넓음을 뜻한단 말인가 들판이 펼쳐진 넓음이라면 골짜기는 움푹 패인 넓음이다. 골짜기는 솟아난 봉우리를 제 속에 담고 있다. 도사의 품이 넓은 것은 그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서다. 자기를 되바라지게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감추면서 온갖 짐승과 나무들을 품어주는 것이 골짜기다.

그래서 겉모습을 보면 혼탁하다.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고 네 편도 내 편도 아닌 것 같다. 흑백이 선명하게 나뉘어 명쾌하게 싸우는 전쟁 마당에서는 그가 서야 할 자리가 없다. 결국 양쪽으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 말고 누가 흐린 것들과 함께 흐려져서는 그 상태로 고요히 있어 마침내 흐린 것들을 천천히 맑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동물의 똥이나 음식물 찌꺼기에 효소가 들어가면 마침내 향기로운 거름이 된다. 이 세상에 누가 과연 말없이 더러운 것들과 하나되어 그것들을 천천히 깨끗하게 만드는 효소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가?

www.jadam.kr 2005-10-19 [ 유걸 ]

만사에 ‘나’를 앞세우며 나서고 일을 함부로 하며 자기 고집을 꺾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스스로 지도자의 자리에 기어올라가 앉는 놈은 절대 아니다. 그런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서 속으로 움직여 마침내 죽어 있는 것들을 천천히 되살려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스스로 가난해질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 세상의 가난은 끝내 풀어지지 않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제대로 된 도사는 자기를 채우지 않는다. 언제나 부족한 상태로 만족을 삼는다. 그러니 부족한 게 있지만 부족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 해지지만 구태여 새것을 이루지 않는다. 천지(天地)가 나와 몸인데 새삼 무엇을 따로 구하겠는가?

기사입력시간 : 2005-10-19 1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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