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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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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거대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지리산은 역사의 산이요, 신앙의 산이며, 생명의 산이고, 사람의 산이다.

www.jadam.kr 2003-09-02
지리산 남부능선

지리산에 담겨 있는 사연, 사연들이 우리의 한 많은 역사라고 할 만큼 수난과 질곡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찍이 마한, 진한을 시작으로 가야와 백제, 신라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을 국경으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으며, 고려 때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참상을 겪어야 했다.

또한 민초들의 단내 나는 숨소리가 요동쳤던 동학혁명과 진주농민운동이 지리산에 와서 마지막 거친 숨을 토해냈고, 해방 후에는 빨치산과 토벌대의 피가 계곡과 능선을 붉게 물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리산은 말이 없다. 다만 1천 5백여년의 세월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보여 줄 뿐이다.

지리산은 민족 신앙의 영지다. 예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던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려왔음에서나, 성모사(聖母祠)와 남악사(南岳祠)의 존재에서도 지리산은 성스러운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www.jadam.kr 2003-09-02
노고단 운해

사시사철 구름 위에 떠 있는 고봉 준령마다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고, 깊은 계곡마다 신령스런 기운이 샘솟는 지리산,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민족 정신이 상처를 입을 때마다 지리산이 먼저 울어 우리를 지켜주었으며, 국운을 열어주는 천지 개벽의 시작이 지리산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하는가 보다. 그러나 이런 신비로움을 구태여 동원하지 않아도 천왕봉에 새겨져 있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글귀처럼 지리산은 우리 모두의 산임을 알 수 있다.

지리산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들에게 삶터를 제공해주는 생명의 산이기도 하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에서 마치 양손을 벌리듯 15개의 남북으로 흘러내린 능선과 골짜기에는 245종의 목본(木本)식물과 579종의초본(草本)식물, 15과 41종의 포유류와 39과 165종의 조류, 215종의 곤충류가 자라고 있다.

또한 경남 산청군의 덕천강을 발원시키고, 경호강을 더해 남강과 낙동강으로 흘러 보내고, 섬진강에도 강물을 보태 경상도와 전라도에 공평하게 삶터를 나눠주고 있다. 인류 문명이 강에서 비롯되었다면 강은 산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산은 인류문명의 모태다.

www.jadam.kr 2003-09-02
지리산 단풍과 계곡

그럼에도 1억 3천만 평에 이르는 지리산의 넓이가 펼치는 넉넉함은 보지 못하고 눈에 들어오는 능선과 계곡만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20여 번 왔다 가면 지리산 박사가 되지만 100번,200번이 넘도록 다니는 사람들은 "지리산은 보아도 보아도 볼 수가 없는 산이다."라고 토로한다. 아무리 잘난 자식도 어미의 모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지리산은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산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사람의 산이다. 동서로 나라의 큰 인물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매천(梅泉) 황현(黃玹)을 낳았다. 17번의 답사 끝에 지리산 동쪽 산청군 덕산에 산천재(山天齋)를 연 남명은 '두류산 양단수( 산청군 대원사 계곡과 중산리 계곡의 물이 합류되는 곳, 현 시천면 소재지 인근)를 예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 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냐 나는 옌가 하노라' 라는 시조를 읊으며 지리산을 찬양했다.

특히 지리산의 정신으로 일컫는 남명은 아는대로 행하라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행동철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임진왜란 때는 그의 제자50여 명이 의병장으로 나섰으며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와 훗날 진주농민운동과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 3.1운동, 진주 형평사(衡平社)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리산 서쪽인 전남 구례에서는 나라의 명운이 다함을 안타까워하던 매천이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통곡을 하며 4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살했다.

www.jadam.kr 2003-09-02
달궁의 가을

지리산은 경남의 산청, 함양, 하동군과 전북의 남원시, 전남의 구례군에 걸쳐 있으면서 오만 가지 삶을 아우르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 20여 개가 펼치는 산자락 둘레만도 800여 리에 이르는 산답게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작품을 낳기도 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치遠)을 시작으로 고려 때는 이인로(李仁老), 조선시대에는 서경덕(徐敬德),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남명, 서산(西山)대사 등이 지리산에 올랐다가 느낀 바를 작품으로 남겼다.

고운은 지리산 곳곳에 글과 글씨를 남기고 가야산에서 영원히 입산하며 '스님이여 산 좋다 말씀마오/이렇게 좋은 산을 낸들 어이 떠나겠소/뒷날 내 자취 찾아 보시구려/한번 들면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니'를 읊고는 약속대로 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이인로는 고려 무신정권 아래서 참담한 생활을 하다 이상세계를 찾아 지리산에 들어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구나/천암(千巖)이 다투어 솟아 있고/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데/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복숭화꽃 살구꽃에 어리어/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 하구나'라고 노래했다.

화담은 반야봉에 올랐다가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 라는 시를 읊고는 즐거워 했다고 『화담집』에 기록하고 있다.

점필재와 그의 제자 김일손은 각각 17년의 간격으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점필재는『유두류록(流頭流錄)』을,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기행문의 백미로 꼽히는 두 작품에서는 당시 선비들의 풍류와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읽을 수 있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천왕봉 일출을 보면서 '햇살에 비친 계곡과 하늘이 온통 구리쇠를 갈아 뿌린 것 같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차츰 눈에 들어오는데 대지의 모든 것이 개미집이요/지렁이가 흙을 물어 쌓은 듯하다'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천왕일출 감상을 적고 있다. 정여창은 천왕봉을 넘어 화개 땅에 이르러서야 '바람에 버들잎 가볍게 나부끼고/사월의 화개 땅엔 누런 보리 물결/두류산 천만겹 다 보고 나서/한 척의 큰 배로 큰 강 따라 흘러라' 라며 지리산을 보고 난 뒤의 포만감을 노래했다.

www.jadam.kr 2003-09-02
뱀사골의 여름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의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은상이 '보라 나는 지금 천왕봉에 올랐노라./구름 안개를 모조리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로 시작하는' 천왕봉 찬가'를 남겼다. 신석정은 '숭고한 산의 Esprit/ 모두 이 산정에 집약되어 있고/ 상징되어 있다./ 하여/ 신은 거기에 내려오고/ 사람들은 거기에 오른다'라고 지리산을 노래했다.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지리산 풍운이 당홍동에 감싸는데/ 검을 품고 남주로 넘어오길 천 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는가/ 가슴에는 굳센 의지가 있고 마음에는 끓는 피가 있다' 라고 진중시를 남겼다.

저항시인 김지하도 '지리산'이란 제목으로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푸른 저 산을 보면/ 노여움이 불 붙는다/저 대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중략>∼/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푸른 저 산을 보면 노여움이 불 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지리산이여' 라고 가슴의 멍울을 풀어내는 시를 발표했었다.

지리산은 작품의 무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서부터 지리산을 무대로 한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중세 리얼리즘의 대표작과 판소리를 낳고, 최근에 들어서는 분단의 역사를 기록한 작품들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나왔다.

매월당(每月堂) 김시습(金時習)은『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지리산자락에 있는 전북 남원 만복사를 배경으로 허황된 듯하지만 남자 주인공 양생과 여자 주인공 최낭자의 사랑을 그으며, 조선 중기에는 판소리문학의 대표작들인 『춘향전』과 『흥부전』, 『변강쇠타령』등이 지리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www.jadam.kr 2003-09-02
지리산 제석봉

현대에 와서는 몰락한 양반의 손자 석이와 소작인의 딸 순이의 비극적인 삶을 내용으로 하는 황순원(黃順元)의 『잃어버린 사람들』을 비롯해 박경리(朴景利)의 대하소설 『토지』와 김동리(金東里)의 『역마』,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 로 시작하는 신동엽(申東曄)시인의 『진달래 산천』, 뱀사골 마뜰마을을 소재로 한 오찬식(吳贊植)의 『마뜰』, 문순태(文洵泰)의 『피아골』과 『철쭉제』,김주영(金周榮)의 『천둥소리』, 이병주(李炳住)의 『지리산』,이태(李泰)의 『남부군』,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등의 작품들이 지리산을 무대로 신분차이로 인한 갈등에서부터 신·구세대들간의 갈등, 이념의 갈등들이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사랑과 분노로 뒤엉키는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지리산은 거대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 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의 철쭉, 벽소령 달밤, 피아골 단풍, 노고단 운해, 연하봉 설경, 불일폭포, 칠선계곡, 섬진강의 맑은 물로 대표되는 지리산10경을 들먹이지 않고도, 한때 지리산에 350여 군데나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 국보만도 7점, 보물 26점에 지방문화재와 주요 사적지, 민속자료까지 헤아리지 않아도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산으로 충분하다. 지리산은 아무 수식이 필요 없는 산이다.

글 출처 : 산청군청

사진 출처 : http://www.e-jirisan.co.kr

기사입력시간 : 2003-09-02 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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