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버섯의 신비(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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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버섯부치. Armillariella tabescens. 영어속명 Ringless Honey Mushroom. 죽은 나무 그루터기 주변에 활짝 핀 뽕나무버섯부치가 함빡 돋아 있는 모습이 탐스럽고 감탄을 자아낸다.)
며칠 전에 어느 잡지를 읽다가 “신비”(神秘)에 대하여 이런 대목을 읽게 되었다. 신비란 신의 “참되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하여 ‘자아’ 혹은 ‘일상성’ 혹은 자신이 구성한 ‘세상’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을 뜻한다.” 이 말과 관련하여 버섯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르기에 여기 우리 버섯 애호가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버섯의 신비”라고 하는 이글의 제목에서 볼 때 우리는 흔히 “신비”라고 하면 그저 어느 것의 신기함 정도를 생각하기 쉽다. 물론 버섯을 발견할 때마다 그 모양새와 색깔은 물론 심지어 저 섬뜩한 독성의 다양함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저 한 없이 신기하기만 하다. 흔한 말로 참으로 신비스럽다. 그러나 버섯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저 신비하다는 생각 저 깊숙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념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름을 느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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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버섯. 다 피어난 것 세 송이와 아직 알 형태의 유균 세 개가 어울려 만나기 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기하다.)
이미 여러 번 말하였지만 버섯을 관찰하고 연구하면 할수록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자연이 품고 있는 그 오묘한 비밀들을 어찌 우리 인간의 머리로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점 점 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거듭 깨닫는다. 물론 버섯은 “생물학적 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 거의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어김없이 돋아난다. 그러나 버섯은 기후와 환경의 조건에 따라 돋아나기 때문에 그 조건이 일정할 수만은 없어서 언제나 새로운 버섯이 돋는 것을 보게 된다. 거듭 느끼는 일이지만 저 흔한 시세 말로 아는 것만큼 보고 보는 것만큼 알게 된다. 아마 평생을 관찰한다고 하여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거듭 깨닫고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는 체 하는 것이 한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버섯의 “신비”라고 한다면 이렇게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언제나 자연 앞에서 자기의 존재가 한 없이 미미하고 미약함을 절감하고 스스로 겸허함을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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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걱간버섯. Polyporus cinnabarinus. 영어속명은 Cinnabar-red Polypore. 등적색의 갓을 가진 반원형에서 부채형의 버섯으로 갓 가장자리가 칼날처럼 생겼고 죽은 벚나무나 참나무에 돋고 따라서 목이나 표고버섯을 기르는 나무에도 돋는 약용버섯이다.)
거기다가 우리가 속하여 살고 있는 곳이 또 얼마나 좁고 제한되어 있는가 우리가 아무리 많은 곳을 여행하고 구석구석 다 가 본다 하여도 좀 지나치게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이 제한된 공간 안에 머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렇듯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역시 제한되어 있다는 “생활공간”의 한계를 깨닫는 것 또한 신비이다. 그래서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밀폐된 우물을 벗어나 바다같이 드넓은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이 신비이다. 버섯의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좁디좁은 생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준다. 어느 날 깊은 산 숲속에서 뜻밖의 버섯을 만났을 때의 그 신비한 느낌은 순간이나마 우리를 무한의 세계로 안내해 준다. 그 세계는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릿속으로 저 아득한 곳을 바라 볼 때의 아득함이다. “나”라는 존재 밖에는 저렇듯 무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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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우단버섯. Paxillus atrotomentosus. 영어속명은 그 줄기가 우단 같이 생겼다하여 Velevet-Stalked Paxillus 또는 Velvet-footed Pax라고 부른다. 갈색 갓은 건조하고 그 끝이 안으로 말려 있으며 엷은 노란색 내리 주름을 가지고 있다. 줄기 밑동으로 내려 갈수록 그 색이 점점 짙어지는 우단 같은 모양을 보여주는 것이 이 버섯의 특징이다. 독은 없으나 맛이 없어서 식용 부적당하다.)
버섯은 그냥 거기 숲속에 그렇게 저 홀로 스스로 있다. 인간의 인식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모습과 색깔을 가지고 그냥 거기 그렇게 있으면서 마음껏 아름다움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잠시 동안만 찰나의 순간에 거기 존재하는 것이고 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 버섯이 내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고, 버섯의 존재는 이러한 내 표현과 아무 상관없이 그렇게 거기 홀로 존재해 왔고 또 존재하고 있다. 버섯은 나와 상관없이, 아니 그 어느 것과도 상관없이 거기 그렇게 저 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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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형주걱혀버섯(임시이름). (Dacryopinax spathularia. 영어속명은 Fan-Shaped Jelly Fungus. 한국 미기록종으로 노란색에 가까운 밝은 주황색을 가진 부채모양의 젤리버섯이다. 고목의 갈라진 틈에 돋는다. 식용불명.)
이렇게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내 안팎에 무한한 생활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내가 갇혀 있는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이제까지 그러한 세계에 안주해 온 자기를 벗어나게 될 때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것,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있던 독선에서 벗어나 나에게 알려지지 않고 내가 접해보지 못한 무한 세계가 내 안팎에 펼쳐져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유아독존의 오만함에서 벗어나는 자아탈출의 경험이 신비이다. 버섯의 신비는 내게 전혀 알려지지 않고, 전혀 보이지 않던 살아있는 한 존재에 대한 발견, 아니 한 생명체와 만남과 그 자각에서 오는 기쁨을 뜻한다고 하겠다.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무성하게 돋아나는 생명체들, 때로는 풍성하게 아름답고, 때로는 섬뜩하게 두렵다. 나무 그루터기는 한 생명의 끝이 아니라 무수한 새 생명으로 이어지는 생명 순환 고리가 새 출발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일 뿐, 그 생명의 고리를 찾아 집요한 추적을 쉬지 않고, 그리고 그 새 생명체들을 만나는 순간 자유로운 탈출을 체험한다. 집요한 추적 끝에 접한 신의 손길에서 무한 세계로 탈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나 하나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나 하나를 중심으로 생활공간을 설정하고, 거기서 형성된 자아를 전부로 알고 믿으면서 살아오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한 이기의 자아에서 탈출을 도와주는 것이 버섯발견의 기쁨과 그 신비에 접하고 난 다음의 결과이다. 기쁨은 나누어야 배가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맺는 연대에서 확대된다. 버섯관찰의 묘미는 바로 이러한 버섯의 신비를 통하여 나 자신이 확대되는 경험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이곳으로 오세요. 여기 신비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 좁은 자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우리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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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진줄기털느타리버섯(임시이름). (Lentinellus omphalodes. 영어속명은 Stalked Lentinellus. 이 버섯 역시 한국미기록종이다. 갓이 겹쳐있고 내리주름에다가 줄기에 골이 지어져 있는 것이 이 버섯의 특징이다. 모양이 이렇게 된 것은 환경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 성장이 불규칙한 때문이라고 한다. 아주 엷은 분홍색이 섞인 갈색버섯이며 포자색은 담황색이고 그 맛이 맵기 때문에 식용할 수 없다. 8월에서 11월에 걸쳐 땅위나 죽은 활엽수 위에 또는 침엽수 가지에 돋는다. 이 버섯은 활엽수 밑동 근처에 돋았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야생버섯을 채취하려 함께 가보실까요?
기사입력시간 : 2008-01-12 02:08:12
최종수(야생버섯애호가), 다른기사보기#최종수#버섯